공지사항
[간호법] 강원도 왕진의사의 글입니다.
- 등록일 : 202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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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법 거부권 행사, 미래를 불태우다
[숨&결] 양창모 | 강원도의 왕진의사
시골 왕진의사인 나는 자주, 의사라기보다는 밀어 넣는 사람이 된다. 그날 뽀빠이 팔처럼 퉁퉁 부은 강 할머니의 한쪽 팔을 보면서도 다시 그런 역할을 예감했다. 림프질환이 의심돼 대학병원에 보내드린 지 한달, 이제는 부종이 좀 빠졌을 거라 기대했던 팔은 오히려 더 부어 있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종류가 다른 압박붕대 8개를 팔 부위별로 매일 새로 감아야 했다. 하지만 대학병원에서 한번 교육받은 걸로 제대로 하기엔 너무 복잡했다. 잘못 감은 붕대는 오히려 림프의 흐름을 방해해 팔을 더 붓게 했다. 퉁퉁 부은 팔 앞에서 망연자실한 나는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드레싱을 해줄 의료진이 없어요. 매일 버스 타고 시내 병원에 가셔야 해요.” 척추협착증으로 몇미터만 걸어도 쉬어야 하는 할머니의 표정은 ‘내가? 어떻게?’라고 묻고 있었다.
산 깊은 곳에 혼자 사는 최 할머니가 전화를 받지 않아 걱정돼 찾아간 날. 숨이 차서 일주일 동안 먹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도, 마지막까지 이 집에 있고 싶다는 할머니에게 나는 말했다. “여기까지 와줄 요양보호사가 없어요. 요양원에 들어가셔야 해요.” 할머니는 몇달 뒤 그토록 가고 싶지 않았던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나는 감방의 간수처럼 집에서 만난 노인들을 불러 병원으로 요양원으로 밀어 넣었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슬픔이다. 분노도 반복되면 슬픔이 된다. 어쩔 수 없다는, 내가 사는 세상이 이렇다는 무력감과 슬픔. 그래서 내게는 지역사회로 의료진을 보내겠다는 간호법이 너무 반가웠다.
지금 간호법 논란 속에는 서로 충돌하는 여러 집단이 있다. 간호사, 의사, 간호조무사…. 하지만 여기에는, 이 논의가 시작된 출발점이자 가장 중요한 집단이 없다. 집에 갇혀 나오지 못하거나 병원에 가기 힘든 환자들이다. 2021년 노인장기요양보험 등급을 받은 사람은 95만4000명이다. 전년도보다 11%가 증가했다. 그런 추세라면 지금은 100만명이 넘을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병원에 갈 수 없는 사람이 100만명이 넘는다는 뜻이다. 의사협회는 간호협회 앞에서는 간호법을 반대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방문진료 가면서 만나는 환자들, 강 할머니와 최 할머니 앞에서 ‘당신에게 의료진이 가는 것을 우리는 반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말 그것이 가능할까. 그럴 순 없을 것이다.
사회변화를 위해서는 변화에 저항하는 세력에 맞설 당사자의 결집이 중요하다. 그래서 기득권 세력은 진정한 이해당사자를 호명하지 않음으로써 사회에 필요한 변화를 무력화시킨다. 간호법이 밥그릇 싸움인 것은 맞다. 문제는 누구의 밥그릇인가이다. 간호법 논쟁의 본질은 언론에서 다루는 것처럼 간호협회와 의사협회라는 두 이익집단의 싸움이 아니다. ‘제발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와달라’는 집에서 나오기 힘든 100만명 환자들과 ‘어떤 일이 있어도 병원에서 나갈 수 없다’는 의협 간의 밥그릇 싸움이다. 언론은 그 싸움의 당사자들을 밥상 앞으로 불러 세울 책임이 있다. 하지만 그 역할을 제대로 하는 언론이 거의 없다. 엉뚱하게도 간호협회와 의협과 간호조무사협회를 불러 세우고 서로 멱살을 잡게 할 뿐이다.
마침 텔레비전 뉴스에 간호법 얘기가 나오길래 여쭤봤다. “할머니, 간호법 아세요?” “몰라.” 할머니는 자기 집에 난 불인 줄도 모르고 불구경만 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다. 사실 간호법이 바꾸는 것은 할머니의 현재만이 아니다. 어차피 간호법은 그 자체만으로 지금 당장 큰 변화를 초래하긴 어렵다. 간호법은 디딤돌일 뿐이다. 그 디딤돌 위에 새로운 의료체계라는 집을 짓는 지난한 과정을 지나야 한다. 간호법은 지금 내가 왕진 가서 만나고 있는 노인들의 모습만이 아니라 20년, 30년 뒤 지금 노인들 자리에 있을 우리들 자신의 모습도 바꾼다. 그러니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할머니의 오늘만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까지 불태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