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기
강석진회장
학위를 받는 강석진 회장
동원공업전문대학 개학식
(1984.10.31)
사업이 번창해 감에 따라 현재의 시설 규모나 설비로는 앞으로의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우리라 판단한 강석진 회장은 다시 공장이전 계획을 세워나갔다. 그의 머릿속에 그리는 새로운 이전지의 조건으로는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각 지방에서 수송되어 오는 원목의 하역과 공장까지의 운반이 용이하여야 하고, 동시에 드넓은 저목장을 조성할 수 있는 곳이라야 한다는 것과 또 하나 머지 않아 국내에서의 원목 수급이 그 한계성을 드러낼 때 해외로부터 원목수입은 불가피할 터인즉, 이를 감안한다면 해상수송의 길밖에 없으니 선박의 접안이용이한 부둣가 해변지역이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부지 물색을 하였다.
그 결과 당시로는 한적하고 조그마한 포구에 지나지 않던 부산 남구 용당동 갯가와 주변일대 야트막한 구릉과 야산을 사들여 연차적인 계획에 따라 공장부지를 조성해 나갔다. 이렇게 하여 1960년 가을에는 1차적으로 공장 건물이 준공되고 생산설비 시설을 갖추어 공장을 가동하면서부터 사업은 활기를 띄우기 시작하였고 1960년 동명목재상사의 합판이 처음 미국에 수출된 것과 1962년에 와서는 정부의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과 때를 같이 하면서 공장의 가동은 더욱 가속도가 붙게 되었다.
1963년, 범일동 공장의 생산시설 설비일체를 용당동 새 공장으로 옮기는 한편 일본, 독일에서 첨단 기계를 들여와 새로운 생산시설을 갖추고 부단한 연구로 개발한 새로운 기법과 기술로 다양한 형태와 무늬의 신상품을 생산 출시해 동명목재상사의 제품은 그 명성과 함께 대량으로 팔려나갔다.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니 전국 77개 동명목재 대리점은 서로 많은 물량확보를 위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1억 달러를 웃도는 수출 실적을 올리기도 하였으며, 이에 앞서 1968년 이후 내리 3년간을 연속하여 전국 수출액 1위에 올라 수출왕의 칭예를 얻게 되고, 대한민국산업훈장, 금탑, 은탑, 동탑을 모조리 휩쓸고 대한민국 국민포장을 수상하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강석진 회장은 결코 자만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늘 오늘의 나를 있게 하고, 동명목재상사가 이렇게 발전·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부산과 부산시민, 그리고 묵묵히 땀흘리며 열심히 일해 준 수많은 종업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며, 나아가서는 튼튼한 안보체제를 구축하여 마음놓고 일할 수 있도록 해준 국가가 아니었던들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부산과 부산시민, 그리고 동명가족과 국가의 은혜에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은혜를 모르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 그러니 나도 이제 작은 일로나마 정성으로 그들에게 보답하고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는 많은 일을 했다. 그리하여 상공인이요 기업경영가인 그는 먼저 부산이 잘 되고 부산 사람이 잘 살 수 있게 하려면 부산경제의 활성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 생각하고 부산경제 발전을 위하여 발 벗고 나섰다. 그리하여 1962년에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추대되어 10수 년간 그 직을 수행해 나가는 동안 부산은행, 부산투자금융, 부산항만부두관리협회를 설립하고 부산데파트를 신축·개장하는 등 부산경제 발전에 헌신하였고 뜻하지 않는 화재와 수해로 궁핍에 떨고있는 이재민을 돕는 데 앞장섰고, B.B.S 부산연맹을 결성, 총재의 직을 맡아 회관을 건립하여 불우청소년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고 그들의 생업자금과 학자금을 지원해 주는 한편 사단법인 부산갱생보호협회의 회장으로서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의 보호와 재기에 힘을 실어주는 데 앞장섰다.
또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국토방위에 전념하는 향토의 국군장병을 찾아가 이들을 위문 격려하고 진해 해군사관학교 경내에는 호국사를, 그리고 남구 남천동의 군수기지사령부 안에는 금련사(金蓮寺)를 지어 바치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가 부산불교신도회장으로서 불법의 포교를 전제한 보시행각(布施行脚)이라기 보다 국가안보를 염원하는 호국정신의 발로로 보는 것이 옳다.
그는 교육 문화 체육사업에도 후원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으니 자녀들과 전혀 연고가 없는 부산대학의 기성회장직을 맡아 부산대학교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취업의 기회와 문호를 넓혀 많은 시민들에게 일터를 제공 함으로써 서민들의 생활안정에 크게 이바지한 바 있다. 동명목재상사를 모기업으로한 동명산업, 동명개발, 동명중공업, 동명식품, 동성해운 등의 설립은 말하자면 동명목재상사가 중화학공업이 중심이 되는 고도 산업사회체제로의 발전적 기업변신을 한 것이다. 새로운 사업의 창출은 곹바로 고용인구의 증대와 실업률 감소와 직결되는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1977년 그의 나이 어느덧 일흔이 되었다. 이제 70평생 지나온 삶의 길을 되돌아보며 생의 마무리를 지어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한평생 벌만큼 벌었고 베풀만큼 베푼 것도 사실이건만 어떻게 하면 회한없는 생애를 마감할 수 있을까를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은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었다. 그리하여 육영(育英)을 필생(畢生)의 업으로 작정하고 학교법인 동명문화학원을 설립, 그 많은 재산을 아낌없이 내어놓았다. 이후 기업경영 일체를 외아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오로지 학원일에만 전념하여 1978년과 1979년 봄에 동원공업고등학교(현 부산 항만물류고등학교)와 동원공업전문대학(현 동명대학교) 두 학교의 개교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1979년 10·26의 국가적 변란은 강석진 회장에게는 일생일대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 계기가 되었다. 권력을 손에 넣은 신군부세력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국정 전반을 전단하면서 경제계의 정경유착적 비리와 부조리를 바로 잡고 반사회적 악덕기업인을 척결한다는 명분아래 강석진 회장을 반사회적 악덕기업주로 몰아 동명그룹을 강제로 해체 도산시키고 그를 구속하기에 이른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자 경향의 각 언론매체는 사설이나 논설을 통하여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재계와 상공계의 뜻 있는 많은 인사들이 앞장서 탄원과 진정으로 그의 무고함을 주장하였으나 서슬이 퍼런 군부의 불순한 정치 논리의 결단에서는 이 모든 노력들이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학교법인을 제외한 강석진 회장과 부인, 그리고 아들의 전 재산과 동명목재상사를 비롯한 그룹산하 전사업체를 고스란히 빼앗기고 말았다. 회한 없는 인생을 마무리지어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던 그의 양심과 선심은 청천벽력에 산산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틈만 나면 붓을 들어 참을 인(忍)자 쓰기를 즐겨하던 그였기에 분하고 억울한 심사를 참고 견디며 안으로 안으로만 새겨 나갈 뿐 결코 남 앞에 내색하는 법이 없었다. 이후 4년 간 세속일과는 담을 쌓고 다만 집과 학교 사이를 오가면서 하루가 다르게 발전되어가는 학원의 모습을 흐뭇이 여기며 지내다가 1984년 10월 29일, "내가 왜 악덕기업인이더란 말인가?" 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만년기는 기업가로서 대성한 시기요 동시에 보은의 자선을 베푼 시혜기(施惠期)라 일컬을 수 있다.